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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정책

대학 불신은 갑자기 오지 않는다

정당 강령 1,000개 이상을 45년 동안 따라 읽으면 무엇이 보일까. 선거 구호보다 느리지만 사회의 감정이 움직이는 방향이 보인다. 미국의 한 연구는 1980년부터 2025년까지 주·전국 정당 강령을 분석해 고등교육을 향한 정치 언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폈다. 결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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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불신은 갑자기 오지 않는다

정당 강령 1,000개 이상을 45년 동안 따라 읽으면 무엇이 보일까. 선거 구호보다 느리지만 사회의 감정이 움직이는 방향이 보인다. 미국의 한 연구는 1980년부터 2025년까지 주·전국 정당 강령을 분석해 고등교육을 향한 정치 언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폈다. 결론은 단순하지 않다. 대학을 둘러싼 갈등은 한 정치인의 등장으로 갑자기 생긴 사건이 아니라, 1980년대 후반부터 축적된 신뢰의 변동이다. 이 글은 미국 정당정치의 세부사가 아니라 한국 독자에게 남는 질문을 다룬다. 왜 어떤 제도는 어느 순간 정책 대상이 아니라 불신의 상징이 되는가.

제도는 무너지기 전에 말이 바뀐다

관찰해야 할 것은 사건보다 언어다. 한 대학이 공격받고 특정 사무실이 폐지되고 총장이 해임되는 장면은 눈에 잘 띈다. 정당 강령에 반복해서 들어가는 단어의 온도는 늦게 감지된다. 그러나 제도에 대한 신뢰는 대개 그렇게 움직인다. 표현이 먼저 달라지고 그다음 예산과 인사와 법이 따라온다.

이 연구가 주목한 자료는 1980년부터 2025년까지 나온 주·전국 정당 강령이다. 연구자들은 교육, 대학, 유니버시티, 가르치다, 교수, 캠퍼스 같은 고등교육 관련 단어를 찾아냈고 그것이 놓인 문맥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손으로 점수를 매겼다. 명시적 부정은 -2, 명시적 긍정은 +2로 분류했다. 방법은 투박해 보이지만 중요한 장점이 있다. 여론조사처럼 순간의 반응을 묻는 것이 아니라, 정당이 공식 문서에 어떤 판단을 남겼는지 추적한다.

핵심은 공화당의 고등교육 호감도가 2024년에 평균 -1.6까지 낮아졌다는 수치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락의 출발점이다. 연구는 이 변화가 트럼프 이전, 1980년대 후반부터 진행됐다고 본다. 갑작스러운 폭발이 아니라 오래된 기울기다. 한국 독자에게 이 대목이 중요하다. 제도 불신은 대개 어느 날 터지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같은 방향으로 쌓인 말이 임계점을 넘는 순간 보인다.

정책 갈등보다 상징 전쟁

대학은 건물과 학위의 합이 아니다. 사회가 지식, 권위, 기회, 세금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가 압축된 장소다. 그래서 대학 논쟁은 등록금이나 전공 개편 같은 정책 문제로 시작해도 곧 다른 질문으로 번진다. 누가 지식을 대표하는가. 누가 공적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캠퍼스에서 나오는 언어는 공동체의 상식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가.

여기서 세울 개념은 상징 전쟁이다. 상징 전쟁은 어떤 제도를 실제 기능보다 더 큰 표지로 다루는 방식이다. 대학이 지역사회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연구와 교육이 어떤 성과를 냈는지, 학생에게 어떤 기회를 줬는지보다 그곳이 어떤 진영의 장소인가가 묻히는 순간이 있다. 그때 정책 토론은 뒤로 밀리고 제도는 적대감의 표지판이 된다.

플로리다의 뉴칼리지는 이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다. 한 정치학자는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보수적인 지역 안에 있던 독특한 리버럴아츠 칼리지가 공화당 정치인들에게도 지역의 자산으로 여겨졌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2023년 1월 플로리다 주지사는 이 대학을 이념적 순응과 워크 행동주의의 장소로 규정하며 대대적 정치 공격에 나섰다. 주지사는 이 캠퍼스를 남부의 힐스데일로 바꾸겠다고 했다. 힐스데일은 정부 재정을 받지 않는 미시간의 소규모 사립 기독교 리버럴아츠 칼리지다.

뒤이어 보수 성향 이사들이 임명됐고 그중에는 크리스토퍼 루포도 있었다. 새 이사회는 당시 총장 패트리샤 오커를 해임했고 DEI 사무실도 없앴다. 한 대학의 행정 변화로만 읽으면 좁다. 이것은 대학을 둘러싼 말이 지역의 자산에서 고쳐야 할 이념 기관으로 이동했을 때 어떤 일이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말이 바뀌면 개입의 정당성도 바뀐다.

한국에서는 대학이 더 복잡한 얼굴을 가진다

그렇다고 이 사례를 한국에 그대로 옮겨오면 오판이 된다. 미국의 정당 강령, 주 단위 정치, 리버럴아츠 칼리지, 공화당 내부의 변화는 한국 제도와 다르다. 한국의 대학 불신은 정당 강령의 문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취업, 지역, 학벌, 세금, 연구, 청년의 삶이 한꺼번에 걸려 있다. 한 단어로 묶기 어렵다.

또 하나의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 대학은 동시에 부러움과 불만의 대상이다. 누군가는 대학을 계층 이동의 사다리로 보고 누군가는 사다리처럼 보이지만 이미 기울어진 구조로 본다. 누군가는 연구와 전문성을 기대하고 누군가는 생활과 동떨어진 말만 생산한다고 느낀다. 따라서 한국의 대학 불신을 단순히 반지성주의나 정치 양극화로만 부르면 정확하지 않다. 불신 안에는 경험의 피로와 기대의 배신이 섞여 있다.

그래서 필요한 판단은 이것이다. 대학 비판은 필요하다. 그러나 대학 전체를 하나의 적대 기호로 압축하는 순간, 비판은 개선이 아니라 동원으로 바뀐다. 등록금, 연구비, 지역 대학의 지속 가능성, 캠퍼스 안의 표현 문제는 각각 다른 검토가 필요하다. 모든 문제를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는 말로 묶으면 논쟁은 빨라지지만 해결은 느려진다.

신뢰는 성과보다 번역에서 먼저 흔들린다

대학이 신뢰를 잃는 이유는 늘 성과 부족만이 아니다. 성과가 있어도 사회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으면 신뢰는 약해진다. 연구자는 논문으로 말하고 행정가는 지표로 말하고 정치인은 분노로 말한다. 이 셋의 문장이 서로 만나지 못하면 가장 큰 목소리가 제도의 이미지를 대신 만든다.

여기서 한국의 독자는 대학만 떠올릴 필요가 없다. 병원, 법원, 언론, 과학기관, 공공기관도 같은 문제를 겪는다. 내부의 전문성은 바깥에서 곧바로 신뢰로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전문어가 설명 없이 반복될수록 거리는 커진다. 제도는 우리가 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어떤 판단 기준으로 일하고 있으며 무엇을 바꾸고 무엇은 지켜야 하는지 바깥의 언어로 설명하는 일이 남는다.

반대로 시민의 불신도 모두 틀린 것이 아니다. 불신은 때로 제도를 깨우는 압력이다. 문제는 불신의 방향이다. 구체적 실패를 묻는 불신은 제도를 고치게 한다.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불신은 제도를 정치적 사냥감으로 만든다. 고등교육을 향한 부정적 언어가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됐다는 연구가 보여주는 것은 이 차이다. 비판이 길을 잃으면 제도는 방어만 배우고 시민은 냉소만 배운다.

한 문장을 먼저 의심하는 습관

이 글이 남길 수 있는 행동은 크지 않다. 대학에 관한 뉴스나 논쟁을 볼 때, 결론보다 먼저 그 문장이 대학을 무엇으로 부르고 있는지 보는 일이다. 비효율적인 기관인지, 이념의 온상인지, 지역의 자산인지, 기회의 통로인지에 따라 뒤따르는 해법은 달라진다. 이름 붙이기는 이미 판단이다.

예를 들어 어떤 캠퍼스 문제가 보도됐을 때, 그 보도가 특정 결정의 타당성을 묻는지 대학 전체의 존재 가치를 흔드는지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사실 확인과 책임의 문제로 간다. 후자는 정체성 싸움으로 간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결과가 다르다. 하나는 고칠 대상을 남기고 다른 하나는 쓰러뜨릴 대상을 만든다.

이 습관은 대학 논쟁에만 쓰이지 않는다. 어떤 제도든 한 문장으로 너무 쉽게 설명될 때 위험 신호가 켜진다. 저곳은 원래 그렇다는 말은 빠르다. 하지만 빠른 말은 자주 판단을 훔친다. 오래된 불신을 읽는 기준은 복잡한 설명을 피하지 않는 데 있다. 불편한 제도일수록 더 정확히 불러야 한다.

정당 강령 1,000개 이상을 따라가며 보인 것은 한 사회가 대학을 싫어하게 된 순간이 아니라, 대학을 다르게 부르기 시작한 긴 시간이다. 말은 정책보다 가볍지만 오래 쌓이면 정책이 걸어갈 길을 만든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에서 우리가 어떤 제도에 붙이고 있는 가장 쉬운 이름은, 몇 년 뒤 어떤 개입을 정당화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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