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수업
AI가 만드는 일자리, 수능이 만드는 사람
9,200만 개가 사라지고 1억 7,000만 개가 생긴다. 세계경제포럼이 2025년에 내놓은 2030년 일자리 전망 수치다. 순증가 7,800만. 숫자만 놓고 보면 낙관론을 지지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 두 숫자를 나란히 세웠을 때 드러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라지는 9...

9,200만 개가 사라지고 1억 7,000만 개가 생긴다. 세계경제포럼이 2025년에 내놓은 2030년 일자리 전망 수치다. 순증가 7,800만. 숫자만 놓고 보면 낙관론을 지지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 두 숫자를 나란히 세웠을 때 드러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라지는 9,200만 개의 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새로 생기는 1억 7,000만 개의 자리로 이동할 경로가 열려 있는지를 이 수치는 말하지 않는다. 같은 기술, 같은 학력, 같은 경험으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아니다. 지금 수능을 준비하는 고등학생이 5년 뒤 어느 쪽 숫자 안에 서 있을지가 이 글이 실제로 묻는 질문이다.
수능이 연마하는 능력과 AI가 대체하는 능력이 겹친다
세계경제포럼이 꼽은 감소 직종에는 패턴이 있다. 데이터 입력 담당자, 행정 보조, 경리, 출납원, 반복 조립 작업자. 이 직종들의 공통점은 정해진 입력에 정해진 처리를 반복한다는 점이다. 속도와 정확도로 성과를 측정하는 자리들이다. 어떤 판단도 요구되지 않는다. 규칙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실행하느냐가 핵심이다.
수능이 측정하는 능력의 구조와 겹쳐 보자. 지문이 주어지고 선택지가 주어지면 오답을 지우고 정답을 고른다. 수학에서는 조건이 주어지면 풀이 경로를 선택하고 오류 없이 계산을 완성한다. 이 구조에서 반복 훈련이 가장 효율적이다. 학원에서 매일 기출을 풀고 오답을 분석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수능 고득점은 이 처리 구조를 극단까지 최적화한 결과다.
문제는 이 최적화된 처리 능력이 사라지는 일자리가 하던 것과 구조적으로 같다는 점이다. 정보를 빠르게 인식하고 패턴에 따라 분류하며 규칙에 맞는 출력을 낸다. AI가 가장 빠르게 대체하는 영역이 정확히 이 구조다. 내신도 다르지 않다. 출제 범위가 정해지고 기출 패턴이 쌓이면 그 패턴을 가장 빠르게 처리한 학생이 높은 점수를 받는다. 한국 고등학교 3년은 이 처리 능력을 체계적으로 강화하는 시간이다. 훈련의 효율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방향이 2030년 이후 노동시장이 요구하는 것과 얼마나 겹치는지는 전혀 별개의 질문이다.
문제를 받는 사람과 문제를 만드는 사람
늘어나는 직종에도 공통점이 있다. AI·머신러닝 전문가, 데이터 분석가, 재생에너지 기술자, 공급망 전문가, 고령화 사회 돌봄 설계자, 교육 설계자. 모두 모호한 상황을 다루거나 맥락을 판단하거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역할이다. 정답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문제 자체를 정의하는 사람이 필요한 자리들이다.
수능 수학에서 킬러 문항을 맞히는 고2 학생의 능력은 실제로 상당하다. 복잡한 조건을 빠르게 파악하고 풀이 경로를 설계하며 오류 없이 계산을 끝낸다. 집중력, 논리 추론, 오류 감지 능력이 훈련된 상태다. 그런데 데이터 분석가가 실제로 하는 일의 구조는 다르다. 데이터셋이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무엇을 측정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어떤 분석 방법이 적절한지도 안내서에 없다. 이해관계자가 원하는 것을 파악하고 그 요구를 데이터 질문으로 번역하며 결과를 다시 언어로 설명하는 과정 전체가 업무다. 문제가 주어지는 자리가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는 사람이 필요한 자리다.
이 간극은 코딩 수업이나 AI 자격증으로 메워지지 않는다. 지금 학원가에서 유행하는 코딩 교육의 다수는 여전히 정해진 입력에 정해진 출력을 내는 구조로 설계된다. 알고리즘을 외우고 문법을 익히며 채점 기준에 맞게 코드를 완성한다. 수능 수학과 형식이 같다. 새로 생기는 일자리가 요구하는 것은 이 형식 밖에 놓인다. 질문을 만드는 능력, 맥락을 읽는 능력, 틀린 접근법을 빠르게 버리고 다시 설계하는 능력. 이것들은 정해진 커리큘럼으로 훈련하기 어렵다. 교과서에 넣을 수 있는 종류의 능력이 아니다.
이 낙관적 수치가 한국 교실 앞에서 멈추는 이유
7,800만 순증가라는 수치는 전 세계 집계다. 지역별 분포는 균일하지 않다. AI 전문가와 데이터 분석가 수요가 집중되는 곳은 실리콘밸리, 런던, 싱가포르, 베이징 같은 특정 허브다. 한국에서는 서울과 판교에 집중된다. 지방 도시의 중소기업, 학원 강사 자리, 지역 행정직 일자리는 이 범주 안으로 잘 들어오지 않는다. 수치는 전 세계적으로 낙관적이지만 기회가 고르게 분산되지 않는다는 것이 첫 번째 제약이다.
시간 좌표도 따져봐야 한다. WEF 보고서의 기준 시점은 2030년이다. 지금 중학교 3학년은 2030년에 만 20세다. 막 대학에 입학했거나 재수 중인 시점이다. 이 학생이 노동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는 것은 2034년 전후다. 그때 어떤 직종이 늘고 어떤 직종이 줄지를 2025년의 보고서는 확정하지 못한다. 5년 뒤 시장을 지금의 수치로 설계하는 것은 정밀하지 않다.
더 근본적인 반론이 있다. 새로 생기는 1억 7,000만 개가 모두 동질의 일자리가 아니다. 그중 상당수는 돌봄, 배달, 소규모 서비스직이다. AI 전문가 수백만 개와 돌봄 인력 수천만 개를 같은 문장에서 '생기는 일자리'로 묶는 것은 정밀하지 않다. 일자리 수와 일자리 질은 다른 지표다. 수요가 늘어난다는 것과 생계 가능한 임금을 제공한다는 것은 다른 문장이다.
한국의 교육과정 개편 주기는 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이 학교 현장에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 2024년이다. 설계 시점에 현재의 생성형 AI 확산 속도는 반영되지 않았다. AI 리터러시 과목이 선택 영역으로 편입됐지만 수능 반영 여부가 불분명하다. 수능에 반영되지 않으면 학원은 가르치지 않는다. 학원이 가르치지 않으면 고3 수험생은 시간을 쓰지 않는다. 이것이 한국 사교육 구조의 중력이다. 낙관적 수치가 교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실질적 장벽이다.
7,800만 기회가 누구에게 열린 기회인지의 문제
7,800만 순증가를 기회로 읽으려면 조건이 붙는다. 전환 가능성이다. 전환은 기존에 하던 일을 조금 수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일의 구조 자체가 달라지는 변화다. 정해진 문제를 푸는 것에서 문제를 정의하는 것으로, 처리 속도에서 판단의 질로, 개인 성과에서 협업 설계로. 이 이동은 기술 하나를 새로 익히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특정 방향으로 굳어진 사고 습관을 뒤집는 일이다.
수능 등급이 높다고 이 전환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는다. 수능 등급이 낮다고 전환 가능성이 막히지도 않는다. 관건은 학생이 지금까지 문제를 받는 경험만 쌓았는지, 아니면 문제를 만드는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해봤는지다. 동아리에서 스스로 기획한 프로젝트, 과제 범위를 벗어나 설계한 탐구 활동, 틀렸지만 끝까지 완성한 창작물. 이것들이 전환 통로의 기초를 만든다. 화려할 필요 없다. 자기 질문이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사라지는 일자리와 생기는 일자리 사이의 거리를 단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그 사이를 이어주는 공식 경로가 없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가 이 통로를 보장하지 않는다. 특정 전공을 선택했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더 일찍, 더 구체적인 자기 주도 경험이 통로를 만든다. 핵심은 입시 결과가 아니라 입시를 준비하는 동안 쌓은 경험의 구조다.
자녀가 AI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물어본 적 있는가
지금 당장 자녀의 입시 준비 방향을 뒤집기는 어렵다. 수능을 앞둔 학생에게 문제를 만드는 능력을 키우라고 말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이 현실을 부정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작은 질문은 지금 바로 시작한다.
자녀가 AI 도구를 어떻게 쓰는지 물어보는 일이다. 답을 그냥 받아 쓰는지, 아니면 자신의 질문을 설계해서 던지고 답을 검토하는지를 확인한다. "이 수학 문제 풀어줘"와 "내가 이 문제에서 막히는 지점이 여기인데, 왜 이 접근법이 작동하지 않는지 설명해줘"는 다른 능력을 쓰는 행위다. 후자는 자신의 오류를 메타 수준에서 바라보는 훈련이다. 이것은 AI 도구 활용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스스로 질문을 설계하는 능력의 차이다. 새로 생기는 일자리가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 능력이다.
자녀가 AI를 어떻게 쓰는지 오늘 처음 묻는다면, 그 질문 하나가 출발점이 된다. 사라지는 쪽과 생기는 쪽을 가르는 것은 도구가 아니라 도구를 쓰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질문을 만드는 습관이 있는 학생과 없는 학생 사이의 거리는 지금 당장 수능 성적표에 나타나지 않는다. 노동시장에 진입한 뒤에야 보이기 시작한다.
9,200만 개가 사라지고 1억 7,000만 개가 생긴다. 순증가라는 숫자는 낙관적으로 읽힌다. 하지만 리드로 돌아와 다시 묻자. 지금 고등학생이 하루에 가장 많이 연습하는 능력은, 사라지는 쪽 숫자에 더 가까운가, 생기는 쪽 숫자에 더 가까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