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독서
완독 권수의 격차가 영어 수업에 묻는 것
RAND 교사 설문을 바탕으로 완독 권수 격차가 한국 영어 내신·수능 대비와 학원 커리큘럼에 주는 시사점을 정리했다.

짧은 지문 풀이가 영어 성적 관리의 중심이 되면 내신과 수능 영어에서 요구되는 정보 처리 속도는 훈련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권을 끝까지 읽는 경험은 다른 문제다. RAND의 2025년 전국 대표 교사 설문을 다룬 보도는 중·고 영어교사의 대다수가 책 한 권 이상을 배정하면서도 실제 완독 권수는 학교와 학생 배경에 따라 크게 갈린다고 전했다. 한국 학원가와 교실도 이 지점을 그대로 지나칠 수 없다.
완독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얇아졌다
The 74 Million이 전한 RAND Corporation 조사에 따르면, 2025년 설문에 응답한 중·고 영어교사 약 1,600명 가운데 약 90%는 적어도 한 권의 책을 배정했다. 또 거의 60%는 학년 동안 세 권 이상을 배정했다고 보고했다. 중등 학년에서 교사들이 배정한 완독 도서는 평균 네 권이었다. 이 수치만 보면 학교 영어 수업에서 책 한 권을 끝까지 읽는 활동이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완독이 중심축인지, 보조 활동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데 있다. 기사에 인용된 RAND 연구자는 고등학교 영어 수업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소설이 이제는 보조적 역할에 머무는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국 영어 수업도 비슷한 긴장을 안고 있다. 내신 영어는 교과서, 부교재, 학교별 프린트, EBS 연계 자료 등 정해진 범위의 정확한 암기와 변형 문제 대응을 요구한다. 수능 영어는 짧은 시간 안에 지문 구조와 선지 논리를 처리하는 평가 도구이다. 이 구조에서는 짧은 지문 훈련이 불가피하다. 다만 기출형 지문만 반복하면 한 권 전체의 흐름, 관점 변화, 정보 누적을 따라가는 독해 체력은 따로 남는다. RAND 자료가 던지는 핵심은 완독의 찬반이 아니라, 완독 경험의 양과 질이 학생마다 다르게 배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권수의 차이는 수업 기회의 차이다
RAND 보고서가 보여준 더 날카로운 지점은 완독 권수의 격차다. 보도에 따르면 저소득층 학생과 유색인종 학생 비율이 높은 학교에서 일하는 교사들은 더 부유하고 백인 학생 비율이 높은 학교의 교사들보다 한 해 두 권을 넘겨 배정할 가능성이 낮았다. 저소득층 학생 비율이 높은 학교의 교사들은 빈곤 수준이 낮은 학교보다 책을 한 권도 배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두 배 높았다. 기사에 제시된 수치는 12%와 6%였다. 장애 학생이나 다언어 학생이 더 많은 교실과 관련해서도 완독 권수의 차이가 언급됐다.
한국의 학원가에서 이 대목은 단순한 미국 학교 사정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내신 대비반과 수능 대비반은 대개 시험 범위와 점수 상승 가능성을 기준으로 설계된다. 교육과정 안에서 읽기 경험을 넓히는 일은 중요하다고 말하기 쉽지만, 실제 커리큘럼에서는 EBS 지문 분석, 학교별 예상 문제, 서술형 대비, 모의고사 오답 정리가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이때 완독은 시간이 남으면 하는 활동이 되기 쉽다. RAND 자료는 완독을 많이 하는 학생과 거의 하지 않는 학생의 차이가 개인 성향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수업 설계가 어떤 읽기 경험을 허용하는지가 곧 기회의 차이가 된다.
짧은 발췌문 중심 수업의 효율과 손실
기사에는 현대의 읽기 교육과정을 둘러싼 논쟁도 함께 제시됐다. 학생들이 한 권 전체를 읽을 체력이나 주의 집중 시간을 충분히 갖고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으며, 짧은 형식의 영상과 한 문장짜리 캡션이 많은 주의를 차지하는 환경도 배경으로 언급됐다. 동시에 현대 읽기 교육과정이 소설이나 단편에서 가져온 짧은 발췌문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비판도 소개됐다. 다만 보도는 영어 수업이 반드시 장편 소설 중심이어야 한다거나 학생이 한 해 몇 권을 읽어야 한다는 확정적 근거는 없다고 분명히 했다.
이 균형이 한국 영어 강사에게 중요하다. 수능 영어와 내신 영어는 지문 단위 독해 훈련을 피할 수 없다. 빈칸, 순서, 삽입, 요약, 제목, 어법, 어휘처럼 평가 도구가 요구하는 사고 절차가 있기 때문이다. EBS와 기출을 활용한 짧은 지문 수업은 시험 대비에서 효율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효율이 곧 충분함은 아니다. 발췌문은 앞뒤 맥락이 잘린 상태에서 구조를 빠르게 포착하는 훈련을 제공하지만, 한 권 전체가 쌓아 가는 논지, 인물, 개념, 정서, 반복되는 표현을 추적하는 경험은 제한한다. 그러므로 짧은 지문 수업을 폐기할 문제가 아니라, 완독 경험과 어떤 비율로 결합할 것인지가 수업 설계의 핵심이다.
교재 의존도와 완독 권수의 연결
RAND 설문은 완독과 교육과정 자료 사이의 가능한 연결도 제시했다. 보도에 따르면 출판사가 개발한 교육과정에 더 많이 의존한다고 답한 교사들은 교사 자신이 개발했거나 학교가 개발한 수업에 더 의존한다고 답한 교사들보다 완독 도서를 더 적게 가르쳤다. 연구자는 출판사 개발 자료가 전체 책보다 발췌문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동시에 출판사가 개발한 교육과정에서 완독 도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학원 교재도 이 문제와 맞닿아 있다. 내신 대비 교재는 학교 시험 범위에 맞춘 지문 분석과 변형 문제로 구성되기 쉽다. 수능 대비 교재는 기출과 모의고사 유형을 중심으로 압축된다. EBS 분석 자료 역시 지문별 소재, 주제, 어휘, 구문, 변형 포인트를 빠르게 정리하는 방식으로 소비된다. 이 구조는 학원가에서 필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하지만 교재가 지문 묶음으로만 설계되면 학생은 영어를 늘 ‘문항이 붙은 짧은 글’로 만난다. RAND 자료는 특정 교재가 나쁘다는 결론을 주지 않는다. 다만 출판 자료 의존과 완독 권수 사이에 차이가 나타났다는 점은, 한국 강사도 자체 커리큘럼 안에 한 권 읽기의 자리를 따로 확보해야 할 이유가 된다.
초등 수치가 중등 영어에 남기는 힌트
보도는 중·고 데이터가 중심이지만 초등 교사 응답도 함께 소개했다. 설문에는 초등 교육자 1,900명 이상이 포함됐다. K-2 학년 교사의 거의 20%는 책을 한 권도 배정하지 않았다고 답했고, 50%는 20권 이상을 배정했다고 답했다. 이는 초기 독자를 위한 더 짧은 책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는 설명했다. 3-5학년 교사 가운데 14%는 책을 배정하지 않았고, 22%는 세 권에서 네 권, 20%는 다섯 권에서 아홉 권을 배정했다고 응답했다. 초등 교사들은 완독이 초기 문해 기능에 쓰는 시간을 밀어내지 않았다고 표시했다는 내용도 제시됐다.
이 수치는 한국 중·고 영어 수업에 직접 대입할 수 있는 처방은 아니다. 초등의 책 길이와 중·고의 영어 원서·논픽션 길이는 다르며, 내신과 수능이라는 평가 압력도 다르다. 다만 하나의 힌트는 있다. 완독은 반드시 기초 기능 훈련과 경쟁 관계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중등 영어에서도 어휘, 구문, 문법, 문제 풀이를 완독과 대립시키면 커리큘럼은 늘 시간 부족으로 끝난다. 반대로 한 권 읽기를 어휘 누적, 문장 구조 확인, 단락 요약, 주제문 찾기, 서술형 근거 쓰기와 연결하면 교육과정 안의 읽기 목표와 평가 도구가 만나는 지점이 생긴다. 학원가가 완독을 별도 이벤트가 아니라 정규 루틴으로 다룰 때 가능한 설계다.
다음 수업에서 바꿀 한 가지
RAND 자료는 영어 수업이 무조건 더 많은 책을 읽혀야 한다는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보도는 영어 수업이 완독 소설 중심이어야 한다는 확정적 근거도, 학생이 매년 정해진 권수를 읽어야 한다는 definitive한 기준도 없다고 전했다. 따라서 한국 강사가 곧바로 ‘권수 경쟁’으로 이동할 필요는 없다. 더 현실적인 변화는 다음 수업이나 다음 학기 커리큘럼에 완독과 기출형 지문 훈련을 나란히 놓는 것이다. 학기별로 원서 또는 논픽션 한 권을 정하고, 수업마다 일부 분량을 읽은 뒤 핵심 어휘, 문장 구조, 단락 요약, 근거 문장을 기록하게 하는 방식이다.
이 한 가지 변화는 내신과 수능 대비를 약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EBS 지문 분석과 모의고사 문제 풀이가 요구하는 독해 절차를 더 긴 텍스트 위에서 반복하게 한다. 평가도 간단히 조정할 수 있다. 한 권 전체에 대한 감상문만 요구하는 대신, 매주 읽은 범위에서 주제문 찾기, 근거 문장 표시, 낯선 어휘 재사용, 짧은 요약, 기출형 질문 만들기를 평가 도구로 삼는다. 이렇게 하면 완독은 시험과 무관한 장식이 아니라 내신 서술형, 수능 장문 독해, 교육과정의 읽기 활동을 잇는 훈련이 된다. 다음 수업에서 바꿀 것은 거창한 혁신이 아니라, 지문 하나를 더 푸는 시간 일부를 한 권을 끝까지 밀고 가는 시간으로 고정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