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수업
불편한 연사의 자리
뉴욕대 졸업식 연사 논란을 통해 표현의 자유, 대학문화, 비판적 사고의 경계를 짚는다. 불편한 관점은 언제 훈련이 되고 언제 배제가 되는가.

졸업식 연사는 축하를 위해 오는가, 아니면 불편한 생각을 들고 오는가. 뉴욕대가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를 졸업식 연사로 정하자 학생 대표들이 반대했다. 그는 대학이 학생을 불편한 생각으로부터 과도하게 보호한다고 비판해 온 인물이다. 이 사건은 한 연사의 호불호보다 큰 질문을 남긴다. 안전한 공감과 불편한 관점의 훈련은 어디서 갈라지고, 대학은 그 경계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축하의 자리는 중립이 아니다
졸업식은 강의실이 아니다. 누군가를 평가하고 반박하는 시간이 아니라, 긴 시간을 통과한 사람들에게 사회가 건네는 공식적 문장에 가깝다. 그래서 졸업식 연사의 선택은 단순한 섭외가 아니다. 대학이 어떤 언어를 축하의 언어로 승인하는지 보여주는 결정이다.
학생 대표들이 반대한 이유도 이 지점에서 이해된다. 하이트가 어떤 연구를 했는가보다, 그가 학생 세대를 어떻게 불러왔는가가 먼저 들린다. 한 세대를 나약하게 길러졌다고 말해 온 사람이 축하의 무대에 선다면, 그 무대는 격려가 아니라 판정처럼 느껴질 수 있다. 축하는 듣는 사람의 감정만 맞추는 행사가 아니지만, 듣는 사람을 지우고 성립하는 행사도 아니다.
한국 독자에게 이 장면이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도 공식 행사의 연사는 자주 논쟁이 아니라 대표성을 의미한다. 누가 단상에 서는가는 그 사람의 발언권만이 아니라, 주최 기관의 판단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이 논쟁은 표현의 자유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질문은 더 좁고 더 까다롭다. 축하의 무대는 불편한 목소리를 어디까지 품을 수 있는가.
불편함 내성이라는 공적 근육
하이트의 문제의식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핵심이 있다. 대학이 불편한 생각으로부터 학생을 과도하게 보호한다면, 대학은 배움의 장소가 아니라 정서적 완충 장치가 된다. 반대되는 관점이 들어올 때마다 그것을 위험으로만 분류하면, 사고는 단단해지기보다 얇아진다. 불편함은 폭력과 같지 않다.
여기서 필요한 개념은 불편함 내성이다. 이는 모욕을 참는 능력이 아니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말 앞에서 즉시 퇴장하거나 삭제를 요구하기 전에, 그 말의 구조를 읽고 반박의 언어를 세우는 힘이다. 불편함 내성은 찬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정확한 반대로 이어진다. 말이 싫다는 감정과, 그 말이 왜 틀렸는지 설명하는 판단 사이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번 사례를 그대로 보면, 대학은 하이트를 불렀고 학생 대표들은 반대했다. 이 두 행동은 서로를 완전히 취소하지 않는다. 대학은 불편한 관점을 무대에 올릴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고, 학생들은 그 무대가 졸업식이라는 점에서 부적절하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반대가 곧 검열인지, 초청이 곧 교육인지 섣불리 단정하지 않는 일이다. 같은 발언도 강의실에서는 토론의 재료가 되고, 졸업식에서는 기관의 메시지가 된다.
안전은 침묵이 아니라 조건이다
하지만 하이트식 문제 제기에도 빈틈은 있다. 학생을 불편한 생각으로부터 보호한다고 비판하는 말은, 때로 학생의 문제 제기를 너무 쉽게 유약함으로 환원한다. 반대가 항상 회피는 아니다. 어떤 반대는 행사의 성격을 따지는 판단이고, 어떤 반대는 발언권의 배치를 묻는 정치적 언어다. 나약함이라는 말은 이 차이를 지운다.
한국 맥락에서는 이 문제가 더 복잡하다. 불편한 관점을 견디라는 말은 위계가 강한 공간에서 쉽게 침묵하라는 말로 바뀐다. 강한 사람이 불편한 말을 던지고 약한 사람이 성숙함을 증명하기 위해 참아야 한다면, 그것은 토론이 아니다. 반면 약한 사람이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반대 의견을 닫아버린다면, 그것도 배움이 아니다. 안전은 아무 말도 다치지 않게 만드는 상태가 아니라, 반박해도 불이익을 두려워하지 않는 조건이다.
그래서 기준은 불편함의 유무가 아니라 관계의 구조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서로를 반박할 수 있는가. 그 말이 검증의 장에 놓이는가. 행사의 목적과 발언의 성격이 맞는가. 이 세 가지가 빠지면 불편한 관점은 훈련이 아니라 일방 통행이 된다. 반대로 이 조건이 갖춰지면 불편함은 배움의 재료가 된다.
대학은 위로 기관도, 충격 기관도 아니다
대학을 안전한 공간으로만 보면 문제는 단순해진다.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은 줄이고, 동의 가능한 말만 남기면 된다. 그러나 그런 대학은 학생을 존중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학생을 약하게 가정한다. 반대로 대학을 충격의 공간으로만 보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불편하면 성장한다는 식의 문장은 너무 싸다. 충격만 주고 해석의 틀을 주지 않는 공간은 교육이 아니라 방치다.
대학은 위로 기관도, 충격 기관도 아니다. 대학은 충돌을 해석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기관이다. 어떤 생각이 왜 불편한지, 그 불편함이 사실의 문제인지 가치의 문제인지, 반대한다면 어느 지점을 반대하는지 분리하게 만드는 곳이다. 그러려면 초청도 정교해야 하고 반대도 정교해야 한다. 연사를 부르는 결정은 자유의 이름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연사를 거부하는 결정도 상처의 이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 사건이 남기는 판단은 여기에 있다. 자유로운 발언은 보호되어야 하지만, 공식 무대는 아무 발언이나 같은 의미로 만들지 않는다. 졸업식이라는 형식은 발언에 축하와 승인이라는 외피를 입힌다. 따라서 논쟁의 핵심은 하이트가 말할 자유가 있는가가 아니다. 그를 그 자리에서 듣게 하는 것이 대학의 어떤 판단을 드러내는가이다.
반대의 문장을 더 정확히 나누는 일
이 글을 읽고 다르게 볼 수 있는 한 가지는 반대의 문장을 나누는 일이다. 어떤 발언이 불편할 때, 곧바로 금지와 허용의 이분법으로 가지 않는 것이다. 이 발언을 들을 수 없는가, 이 자리에서 듣고 싶지 않은가, 듣되 반박의 조건이 필요한가. 세 문장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르다.
첫째 문장은 발언 자체의 한계를 묻는다. 둘째 문장은 무대와 맥락의 적합성을 묻는다. 셋째 문장은 토론의 조건을 묻는다. 이 구분이 생기면 논쟁의 온도는 낮아지지 않더라도 방향은 선명해진다. 상대를 겁쟁이나 가해자로 부르기 전에, 무엇을 문제 삼는지 드러낼 수 있다.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판단의 자리를 찾는다.
한국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불편함을 무조건 참는 태도도, 불편함을 무조건 제거하는 태도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자리의 성격을 읽는 능력이다. 같은 말도 토론회, 강의실, 졸업식, 회의실에서 다르게 작동한다. 말의 자유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말의 배치다. 누가 말하고, 어디서 말하며, 듣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로 도착하는가.
처음 질문으로 돌아간다. 졸업식 연사는 축하를 위해 오는가, 아니면 불편한 생각을 들고 오는가. 아마 둘 중 하나만 답하면 이 논쟁은 계속 제자리로 돌아온다. 축하가 생각을 금지하지 않고, 생각이 축하를 지우지 않는 자리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