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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수업

편리함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지는 것들

Waymo와 Tesla의 로보택시 확장을 둘러싼 The Atlantic의 비판을 출발점 삼아, '편리함'이라는 단어가 가린 인간 접점의 가치를 한국 독자의 자리에서 다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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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함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지는 것들

택시는 수천 년 동안 형태가 거의 바뀌지 않은 도시 서비스다. 고대 로마의 시시움, 17세기 프랑스의 피아크르, 19세기 영국의 핵니 코치까지 — 마차가 자동차로 바뀌었을 뿐, 운전자가 짐을 실어주고 도시 이야기를 건네며 목적지로 데려가는 경험 자체는 그대로 이어졌다. 그러던 흐름이 2009년 차량 호출 앱으로 한 번 흔들렸고, 이제 Waymo와 Tesla가 운전자 자체를 지우려 한다. The Atlantic의 칼럼 'People Who Don't Like People Are Making All Our Decisions'는 이 변화의 결을 곱씹는다. 핵심 질문은 단순하다. 더 편해지는데, 왜 어딘가 허전한가.

택시는 왜 그렇게 오래 비슷한 모습이었나

The Atlantic의 칼럼니스트 Xochitl Gonzalez는 글의 도입을 신화처럼 시작한다. 사람이 도시를 만들었고, 도시가 택시를 낳았고, 그것은 좋았다고. 그리고 수 세기 동안 거의 바뀌지 않았다고. 이 말은 농담 같지만 의미심장하다. 어떤 기술이 오랫동안 같은 형태로 유지된다는 것은 그 안에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차량 호출 앱은 분명히 많은 골칫거리를 한꺼번에 없앴다. 추운 길에서 손을 들고 빈 차를 찾는 일, 탑승 후 목적지를 거부당하는 일, 인종 때문에 멈추지 않는 택시, 두고 내린 물건을 영영 잃어버리는 일. 모두 과거로 보냈다. 그런데 칼럼은 이렇게 묻는다. 이 모든 개선을 상상하면서, 운전자 자체를 없애는 건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었다고. 개선이 곧 제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데, 실리콘밸리는 자꾸 둘을 같은 말처럼 쓴다.

한국에서 택시 호출 앱이 일상이 된 지도 꽤 오래되었다. 길가에서 손을 흔드는 풍경이 빠르게 사라지는 동안, 그 변화가 운전자라는 존재 자체를 지우는 방향으로 이어진다는 상상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는 이미 다른 도시에서 시작되고 있다.

Waymo와 Tesla가 그리는 다음 단계

칼럼이 인용한 구체적인 움직임은 이렇다. Tesla는 이미 무인 택시 서비스를 운영 중이며, 텍사스 기가팩토리에서 핸들도 페달도 없는 로보택시를 생산한다고 발표했다. 알파벳 자회사 Waymo는 2020년 상업 서비스를 시작했고, 최근 160억 달러를 조달해 20개 이상 도시로 확장할 계획이다. 작년 11월부터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Waymo 차량이 고속도로와 일부 공항까지 운행할 수 있게 됐다. 다음 목표는 미국 택시의 본거지 뉴욕시다.

Waze 공동창업자 Uri Levine은 Business Insider 인터뷰에서 베타 세대는 운전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 다음 세대에게 '예전에는 사람이 직접 차를 몰았다'고 말하면 믿지 않을 거라고 했다. 구글 자율주행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로보틱스 연구자 Sebastian Thrun은 매년 교통사고로 잃는 120만 명의 생명을 거론하며, 그중 일부라도 되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기술이냐고 말한다.

그 120만이라는 숫자는 사실이다. 다만 이는 전 세계 수치이고, 그 사망의 90% 이상은 저·중소득 국가에서 발생한다 — Waymo나 Tesla가 진출하려는 시장이 아닌 곳들이다. 안전이라는 명분과 실제 서비스가 향하는 곳 사이에는 이렇게 간격이 있다.

'안전'이라는 단어 뒤에 있는 것

자율주행 산업협회(Autonomous Vehicle Industry Association)는 무인 차량이 생명을 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Union of Concerned Scientists는 회의적이다. 자율주행차가 유색인종과 어린이를 잘 감지하지 못한다는 연구가 있고, 수백만 명의 운전자 일자리를 대체하며, 대중교통 예산에 악영향을 주고, 기존 교통 시스템의 불평등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칼럼이 더 분명히 말하는 것은 이익 쪽이다. 자율주행차는 2030년까지 870억 달러 규모 산업이 될 것으로 전망되고, 무인 택시와 로봇 배송을 포함한 '승객 경제'는 2050년까지 7조 달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기업이 안전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사람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품을 팔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두 동기를 분리해 듣지 않으면 판단이 흐려진다.

이 구도는 자율주행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어떤 기술이 등장할 때 '안전' '효율' '편리'라는 단어가 함께 쓰이면, 그 단어 뒤의 산업 규모와 누가 그 돈을 가져가는지를 같이 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사용자 입장에서 좋아진다는 말과, 사회 전체에 좋다는 말은 같은 문장이 아니다.

택시에서 사라지는 것은 운전자만이 아니다

Gonzalez가 글에서 가장 공들여 말하는 부분은 안전 통계나 산업 규모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새 도시에 갈 때마다 받는 '개인 맞춤 소개'를 이야기한다. 한때 할리우드에서 스턴트를 했고 이제는 다시 택시 근무를 잡아야 하는 남자, 팬데믹에 식당이 문을 닫자 운전을 시작한 60대 해군 참전 용사. 그들이 차창 너머로 들려주는 도시의 다른 시간들. 칼럼의 표현 그대로, 우리 대부분은 '직업·학력·소득·언어·신앙이 비슷한 사람들과 모여 사는 사일로(silo)' 안에서 산다. 다른 삶의 방식과 스치는 순간이 드물고, 택시는 그런 만남이 그래도 규칙적으로 일어나던 자리 중 하나였다.

이 지점이 이 칼럼의 제목 —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의 결정을 좌우하고 있다' — 의 진짜 뜻이다. 운전자를 비용으로만 보는 시선에는 그가 도시의 한 조각을 옮겨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효율이라는 잣대만 들이대면 그 만남은 어차피 측정되지 않는 무엇이라 가장 먼저 깎인다.

한국 도시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조용히 일어난다. 무인 주문 키오스크, 셀프 계산대, 챗봇 상담. 각각은 작은 편리함이지만, 모이고 나면 하루 동안 다른 직업·다른 세대의 사람과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 도시를 통과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 침묵은 누구도 정책으로 결정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기본값이 된다.

'편리함'이라는 단어를 다르게 듣는 법

실리콘밸리가 새 기술을 소개할 때의 어휘는 거의 같다. 미래의 꿈이 마침내 실현된다, 진보는 불가피하다, 더 안전하고 더 쉬운 내일이 온다. 칼럼은 이 어휘의 익숙함 자체가 경계해야 할 신호라고 본다. 모든 변화를 같은 문장으로 포장한다는 것은, 그 변화들이 실제로 가져오는 서로 다른 결과를 같은 톤으로 묻어버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은 자율주행 바깥에서도 그대로 쓰인다. 자동 채점, AI 튜터, 자동 상담, 자동 면접. 각각 분명히 무언가를 더 빠르게 만든다. 그러나 그 빠름이 무엇을 대체하는지를 같이 봐야 한다. 학습에서 사람과 사람이 마주 앉아 다음 한 문장을 함께 다듬는 시간, 진료에서 의사가 환자의 말끝을 받아 한 번 더 묻는 순간, 채용에서 면접관이 답변 뒤의 망설임을 읽는 일. 이런 접점은 측정 지표에 잘 잡히지 않기 때문에, 자동화가 효율을 증명할 때 가장 먼저 잘려나가기 쉽다.

'편리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편리함이 누구의 시간을 줄였고 누구의 자리를 지웠는지를 한 번 더 묻는 것. 그것이 칼럼이 권하는 작은 청취법이다. 편리함은 거의 항상 진짜다. 다만 그것이 전부인 적은 거의 없다.

다음에 무인 시스템 앞에 설 때

이 글이 자동화에 반대하라는 주장으로 읽힌다면 절반만 읽은 것이다. 칼럼은 차량 호출 앱이 진짜로 해결한 문제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인종 때문에 멈추지 않는 택시, 거부당하는 승차, 잃어버린 물건. 그 변화는 분명한 진전이었다. 문제는 다음 한 걸음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하느냐다.

독자가 이 글을 덮은 뒤 시도해볼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다음에 무인 시스템 앞에 설 때 그 자리에 원래 누가 있었는지를 잠깐 떠올려보는 일이다. 키오스크 앞이든, 셀프 계산대 앞이든, 챗봇 화면 앞이든. 그 사람과 굳이 다시 마주치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충분히 많아야, 다음 자동화가 어디까지 가도 되는지를 사회가 함께 정할 수 있다.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결정을 통째로 맡기지 않는 방법은,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빈자리를 계속 헤아리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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